<4차 산업혁명과 법적 규제의 태도>

  1. 4차 산업혁명의 속성에 맞는 규제 도입의 필요성

재주복주(載舟覆舟)는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어 엎기도 한다.”는 뜻으로 춘추시대 법사상가 순자의 말이다. 이는 현대사회에서는 신기술과 관련된 산업과 규제의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적절한 규제는 관련 산업을 띄울 수도 있지만 잘못된 규제는 산업을 뒤집어 엎기도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많은 규제들은 제조업 중심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예컨대 건설기술진흥법, 식품산업진흥법 등 각종 진흥법의 이름을 가진 규제들은 제조업 시대의 산물인 셈이다. 이러한 규제들이 모두 적절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결과적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게 된 것은 당시 정부의 규제가 제조업을 잘 이끌어 왔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최근 규제 때문에 우리 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규제를 피해 4차 산업혁명을 이끌고 있는 혁신기업들이 한국을 빠져나간다는 지적도 있다. 2018년 10월 세계경제포럼(WEF)의 국가경쟁력 평가에 따르면 4차 산업혁명 등의 지표를 반영한 한국의 국가경쟁력은 140개국 중 15위였다. ICT 보급(1위), 거시경제(1위) 등의 지표는 매우 우수한 편이었다. 반면 규제개혁에 관한 법률적 구조의 효율성(Efficiency of legal framework in challenging regulation) 57위, 정부 규제가 기업 활동에 초래하는 부담(Burden of government regulation) 79위, 은행의 규제자본 비율(Banks’ regulatory capital ratio) 97위 등으로 규제와 관련된 항목들에서는 중위권 내지 하위권의 성적을 보였다. 제조업 기반에서 그런 대로 잘 작동해 왔던 규제 체계가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새로운 산업에는 족쇄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년 10월에 나온 세계경제포럼의 국가경쟁력 평가 보고서는 현재 우리나라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규제 완화 및 규제 방식의 변화가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아래에서는 규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4차 산업혁명의 특성을 살펴보고, 그 특성에 맞는 규제를 위해 정부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으며 부족한 점은 없는지 알아본다.

  1. 4차 산업혁명의 성격: 분야 간 융합, 새로운 산업의 등장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2016년 1월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에서였다. 세계경제포럼에서는 4차 산업혁명은 3차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과 바이오산업, 물리학 등의 경계를 융합하는 기술 혁명이라고 설명했다. 3년전 처음 등장한 용어라 4차 산업혁명이 무엇인지 아직 명확하게 합의되지는 않았지만 세계경제포럼의 설명을 토대로 4차 산업혁명의 특성을 유추해볼 수 있다.

첫 번째 특성은 기존 산업과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융합이다. 산업별, 학문별로 분화되어 있던 지식과 정보들이 고도로 발달된 정보통신기술과 컴퓨팅 기술을 기반으로 연결된다. 두 번째 특성은 융합에서 나오는 새로운 산업의 출현이다. 다양한 분야의 융합으로 나온 결과물을 빠르게 계산할 수 있는 정보처리 장치는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유형의 새로운 산업을 탄생시키고 혁신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가령 주위 사물들을 정밀하게 감지하는 센서기술과 센서들을 통해 들어온 수많은 데이터를 빠른 속도로 분석하여 판단까지 내릴 수 있는 인공지능 컴퓨팅을 결합한 결과 탄생한 자율주행 자동차, 고도로 발달한 생명공학 기술과 정보처리 기술이 결합하여 탄생한 개인별 유전체 맞춤 진료 서비스 등이 가까운 미래에 현실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4차 산업혁명의 특성은 분야간 융합과 새로운 산업의 출현 두 가지 측면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특성들을 고려할 때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혁신기술의 특성에 맞는 규제는 기존의 각 산업을 임의로 나누고 그 산업만을 규제하던 소위 ‘칸막이 규제’ 방식에서 벗어나 산업 간 융합을 도모해야 하며,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산업에 대해서는 그 산업을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상태에서도 이를 규범 안에 포섭할 수 있는 유연한 형태의 규제가 필요하다.

  1. 분야 간 융합 위한 규제 샌드박스

가. 규제 샌드박스 정의 및 소개

산업계의 규제 완화 요구 및 융합을 위해 규제의 칸막이를 열어달라는 요구에 정부도 부응하려 노력하고 있다. 최근 ‘규제 샌드박스’가 시행되었다(정보통신 진흥 및 융합 활성화 등에 관한 특별법과 산업융합 촉진법(이하 “정보통신 융합법”)과 산업융합 촉진법은 1월 17일, 금융혁신지원 특별법(이하 “금융혁신법”)은 4월 1일, 규제자유특구 및 지역특화발전특구에 관한 규제특례법은 4월 17일부터 각 시행됨). 샌드박스(Sand Box)라는 명칭은 유아들이 모래를 갖고 놀 수 있도록 집안에 만들어준 모래 상자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규제 샌드박스는 기존 사업자에 비해 유아처럼 연약한 신기술산업 그 자체와 신기술 사업자들을 위해 한시적으로 기존 규제의 적용을 면제해주어 그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고 성공적으로 시장 진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 규제 샌드박스는 융합을 통한 새로운 산업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융합하는 2개 이상의 산업 군에서 각각 규율 받던 규제가 모두 적용되어 지나치게 과한 규제가 적용되는 산업에 대한 구제 수단에 해당된다. 혁신적 아이디어를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를 할 때, 노력과 비용이 다른 산업에 비해 두 배 이상이 든다면, 당초부터 새로운 성장을 저해하는 결과를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입법되어 규제 샌드박스라 불리는 위 4종의 법령들은 1) 규제 존재여부에 대한 신속확인 신청규정, 2) 임시허가 신청규정, 3) 규제 특례 신청규정을 두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 중 가장 많은 승인건수를 기록한 규제에 관한 특례 규정(이하 “규제특례 규정”)은 규제 샌드박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국무조정실 보도자료에 따르면 2019년 4월 26일 규제 샌드박스 시행 100일 기준 임시허가 승인 4건, 실증특례 승인 18건, 기타 적극행정 4건 총 26건).

규제특례 규정이란 기존의 규제를 적용함에 있어 1) 관련 규제가 아예 존재하지 아니하는 경우 또는 2) 관련 규정이 존재하더라도 불명확 또는 불합리한 경우 규제의 특별한 적용을 요구할 수 있는 규정을 말한다.

위 규제 샌드박스 법률들 중 일례로 정보통신융합법에 따른 규제특례의 절차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신규 정보통신 융합서비스를 활용한 사업을 하려는 신청자가 관련 규정에 의하여 허가를 신청하는 것이 불가능 하거나, 근거가 되는 법령 등이 불명확 또는 불합리한 경우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에게 법령에 따른 허가 등의 필요여부 확인 신청을 한다(정보통신융합법 제38조의2 제1항).

2) 이를 접수한 장관은 관계기관 장에게 통보를 하게 되고(동조 제2항), 관계기관의 장은 신청내용을 검토하여 30일 이내에 장관에게 회신하여야 한다(동조 제5항).

3) 장관과 관계기관은 신청을 검토한 후 심의위원회의 심의, 의결을 거쳐 실증을 위한 규제특례를 지정할 수 있다(동조 제3항).

4) 장관과 관계기관 장은 실증을 위한 규제특례를 공동으로 관리감독하고(제38조의3 제1항), 관계기관의 장은 법령의 정비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법령이 정비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동조 제3항, 제4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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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규제 샌드박스의 성과

규제 샌드박스 시행 이후 짧은 기간동안 수많은 신청이 접수되며 산업계의 호응이 있었다. 금융 분야에서는 대출조건 비교 서비스와 관련된 업체들의 신청이 많았다. 아래의 FINDA는 정보통신기술과 금융서비스의 융합 사례이다.

금융감독원의 ‘대출모집인 제도 모범규준’은 제9조 제2항에서 ‘대출모집법인은 1개의 금융회사와 대출모집업무 위탁계약을 체결해야 하고 대출상담사는 1개의 금융회사 또는 대출모집법인과 대출모집업무 위탁계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이 규제는 금융회사의 관리감독 책임을 강화하여 대출모집인의 불건전 영업행위를 차단하기 위해 도입된 규제이고, 대출모집인이 여러 금융기관의 대출모집을 할 수 없게 된 결과 무분별한 대출 권유 전화 등의 마케팅 활동을 하던 대출모집인들의 소속이 명확해져 불법 영업행위가 줄어드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위 규제 때문에 금융소비자들은 여러 금융기관들이 제공하는 대출서비스에 대한 정보들의 비교가 어려웠다. 같은 유형의 대출이라 하더라도 각 금융기관마다 또는 같은 금융기관도 각 지점마다 적용되는 대출금리에 차이가 있다. 대출신청자 입장에서는 0.1%라도 저렴한 대출을 받아야 유리하기 때문에 이 은행 저 은행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아야 했다. 전자제품 가격비교 사이트가 등장하기 전 용산전자상가와 테크노마트를 돌아다녔던 것처럼 말이다

왜 전자제품처럼 대출상품을 한눈에 비교하여 구매할 수 있는 사이트는 없었을까? 앞서 언급한 ‘대출모집인제도 모범규준’ 제9조 제2항 때문이었다. 대출모집인이 1개의 금융회사에 전속하게 되어 여러 금융회사의 대출 정보들을 한번에 나열하고 금융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을 선택하게 할 수 있는 비교 사이트를 만들 수 없었다. 규제 샌드박스 시행(금융혁신법)으로 FINDA와 같은 모바일 금융어플리케이션 개발업체는 일종의 대출모집인 역할을 하면서도 규제특례 규정을 적용 받아 여러 금융회사와 연동개발을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전자제품 가격비교사이트처럼 대출도 모바일 앱을 통해 최저가를 검색하는 앱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금융서비스 비교 앱 FINDA의 승인 사례를 통해 대출모집인제도에 대한 금융감독원 규제와 같은 규제 때문에 신기술 사업자에게는 사업 자체를 할 수 없는 큰 장벽이 될 수 있음과 동시에, 규제 샌드박스가 문제를 해결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다. 규제 샌드박스의 한계

정보통신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규제 샌드박스의 성공사례로 소개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시장 진입의 실패로 끝난 사례도 있다.

㈜뉴코애드윈드는 광주시에 대해서 배달용 오토바이에 디지털 배달통을 설치하여 음식업체와 대표음식을 광고하는 서비스를 정보통신 융합사례로 신청하였다. 옥외광고물법 제4조 제1항 및 동법 시행령 제24조 제2항 제5호에서는 교통수단 이용 광고물을 금지하고 있고, 자동차관리법 제34조 및 동법 시행령 제55조와 [별표1] 자동차 튜닝에 관한 규정에서는 등화장치의 변경은 인증된 자동차 제작자만이 할 수 있다고 규제하고 있다. 디지털 배달통은 교통수단을 이용한 광고 수단이라 옥외광고물법에 반하고, ㈜뉴코애드윈드는 자동차 제작업체가 아니어서 일종의 등화장치에 해당하는 디지털 화면을 설치할 수 없었다.

광주시는 정보통신융합법 제32조의2에 따라 위 업체의 규제특례 신청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실증특례(시도지사에게 신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서비스와 제품의 시험, 검증을 위해 사업계획을 수립하여 특례 부여를 요청하는 제도)로 허용된 사업규모가 최대 100대에 불과하였다. 광고업계의 스타트업인 위 업체는 대한민국에서는 실증 특례를 적용해도 100대 규모로는 사업성이 없기에 베트남으로 떠날 예정이다. (관련기사:http://www.edaily.co.kr/news/read?newsId=01164406622489248&mediaCodeNo=257&OutLnkChk=Y)

실증특례 승인규모가 신청보다 현저히 작다는 한계는 규제 샌드박스 1호 기업인 DTC(소비자 직접의뢰 유전자검사)기업 ㈜마크로젠 등 여러 특례에서도 나타난 바 있다. ㈜마크로젠은 실증 특례를 신청한 기업으로 맞춤형 건강서비스 제공을 위해 유전체 자료 수집으로 1만명의 모수를 신청하였으나 2000명의 모수를 실증특례로서 승인 받는 것에 그쳤다. 관련 규제의 부재로 아예 사업을 시작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실증특례 규모의 지나친 제한은 곧바로 사업성 악화 및 제품/서비스 출시 지연으로 이어지는데 하루라도 빨리 사업을 안착시켜야 하는 신생 소규모 사업자들에게는 치명적이다.

FINDA, (주)뉴코애드윈드 등 규제 샌드박스가 승인된 사례들은 대부분 매출규모가 1,500억 원 미만으로 중소기업에 해당하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업체의 것이었다. 정부가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하여 규제 완화를 위한 시작은 하였으나 실질적으로 혁신의 성과를 보여줄 만한 과감한 대규모의 혁신은 나타나지 않았고 스몰 비즈니스에 대한 승인에 그치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스몰 비즈니스에 대해서 규제 샌드박스를 허용하면서도 그 허용범위마저 제한한 것은 각 정부부처가 규제 샌드박스의 원래 취지와 달리 규제 완화에 소극적이고 조심스럽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규정에 따른 업무 수행을 원칙으로 하는 공무원에게 과감하고 혁신적인 사업가의 마인드를 가지라고 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측면도 있다. 규제 샌드박스는 4차 산업혁명 기술들이 요구하는 융합을 위해 각 정부 부처의 규제 별로 높게 쳐진 칸막이를 열어준다는 것에 의의가 있지만 정부 및 공무원의 특성상 과감한 조치가 나오기가 어렵다는 점, 생소한 4차 산업혁명의 새로운 산업들을 공무원이 정확히 이해하여 규율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앞서 설명한 규제 샌드박스는, 아직까지는 적용기간이 길지 않아 그 적용이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규제 완화를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으며 종전보다 유연한 입장에서 특례를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그런데 종전에 없던 새로운 산업이라 규제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영역에 대해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1. 신사업에 대한 규율로서 Soft Law의 필요성

가. Soft Law(연성 규범)와 Hard Law(경성 규범)

Soft Law는 민간에서 국가기관의 개입 없이 동종 업계 종사자들끼리 자율적으로 제정한 협약이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 김상조 위원장이 Soft Law와 Hard Law의 개념을 언급하고 혁신성장과 공정경제를 위한 Soft Law의 도입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기사: http://paxnetnews.com/allView?vNewsSetId=6073&articleId=2019030518031503646&objId=A2019030518031503646&portalCode=naver). 공정거래와 관련된 각종 규제들을 점검하고 만들어내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수장이 직접 Soft Law를 언급했다는 측면에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Hard Law(경성 규범)는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법규범이다. 국회의 입법에 의해 만들어진 법률과 그에 따라 행정 각부처가 만든 시행령, 시행규칙 그리고 각종 고시 및 지침으로 만든 규제들이다. 반면 Soft Law(연성 규범)는 업계 내부의 자율 규범과 같이 국회를 거치지 않고 만들 수 있는 규제를 말한다.

Hard Law와 Soft Law는 법적 구속력 유무에 따라 구분된다. 국민의 자유권을 제한하는 규제는 입법권 위임에 따라 국회가 제정한 법률로 규제하는 것이 원칙이다. 국회 또는 정부기관의 기술 및 산업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규제 마련 절차 자체가 지난한 경우도 많고 Hard Law는 개정도 쉽지 않아 급변하는 기술 분야에는 적합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대안인 Soft Law가 법적 구속력이 없어 위반한 행위에 대해 강제력이 없다는 비판도 있으나, 아래 사례를 살펴보면 해당 업계 스스로 구속력을 마련할 방안을 찾을 수도 있고, Hard Law가 갖는 획일성, 경직성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산업에 적용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나. Soft Law가 성공적으로 도입된 국내 사례

1) FRAND 선언(국제 통신특허 표준)

FRAND는 Fair, Reasonable, and Non-Discriminatory의 줄임말로 통신기술 특허의 독점방지를 위해 민간기구인 유럽통신표준연구소(ETSI)에서 제정한 특허기술에 대한 예외조항이고 애플과 삼성의 특허 소송으로 유명해진 바 있다. 다른 기술들도 표준이 되는 기술 정립이 중요하겠으나 통신 산업의 경우 통신기기 제조사들이 서로 호환되는 통신기술을 사용하여야 하므로 표준기술의 필요성이 더욱 크다. 이 때문에 FRAND는 가입한 업체의 기술 특허가 업계의 표준이 되면 FRAND선언을 한 업계의 누구나 차별 없이, 공정하고 합리적인 대가를 지불하면 특허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발명가의 권리 보호를 위해 제정된 Hard Law인 각 나라의 특허법은 특허권자에게 배타적이고 강력한 권리를 부여하고 있지만 민간기관인 유럽통신표준연구소가 만든 Soft Law를 통해 일종의 예외를 인정한 것이다. 굳이 정보통신산업진흥법 및 특허법을 통신산업의 빠른 변화에 따라 곧 바로 개정하지 않더라도 Soft Law의 규범력만으로도 빠르게 변화하는 통신 시장의 특허기술 공유 문제를 규율할 수 있다. FRAND선언 없이 표준 특허를 사용하는 업체들에게는 손해배상 청구 및 침해금지청구 등의 제재도 가능하기 때문에 Soft Law의 경우에도 상당한 규범력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스튜어드십 코드

최근 국민연금의 스튜어드 십 코드 행사여부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여기서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란 주요기관투자가들 사이의 의결권 행사지침을 말한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자문사인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2014년 금융위원회의 스튜어드십 도입계획에 따라 2016년 한국 스튜어드십 코드로 1) 수탁자로서 명확한 정책 마련, 2) 이해상충 문제 해결정책 마련 및 공개, 3) 투자대상회사 주기적 점검, 4) 수탁자 책임 이행을 위한 지침 마련, 5) 의결권 행사를 위한 정책을 마련하고 공개, 6) 의결권 행사 및 수탁자 책임 이행의 주기적 보고, 7) 수탁자로서 역량과 전문성 제고와 같은 7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해설서를 제공하고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모범기준만을 제시할 뿐 법적 구속력도 없고 가입 및 이행을 강제하지 않기 때문에 Soft Law에 해당한다. 금융위원회는 기관투자자들의 의결권 행사 등을 Hard Law로 규제하기 보다는 기준이 되는 스튜어드십을 공개하고 이를 초안으로 각 기관에 맞게 반영하여 스튜어드십 코드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의결권 행사라는 규제를 하기 어려운 영역에 대해 무방비 상태로 방치하지 않으면서도 업계가 자체적으로 따라야 할 Soft Law를 둘 것을 권장하여 유연한 규제 방식을 취하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다. Soft Law의 한계 및 보완

이와 같이 Soft Law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규범처럼 보이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Soft Law 자체가 영향력 있는 기술 표준이 되기도 한다. 참여자들을 구속할 수 있는 실질적 규제가 되거나 내부적으로 적용되는 규범이 외부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제정절차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Soft Law의 구성은 객관성 및 중립성을 담보하기 위해 새로운 산업의 종사자들의 요구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규제와 법률에 대한 이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신기술에 대해서 Soft Law도입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기술에 대한 이해가 밝은 법률가가 참여하여 산업계의 요구와 정부의 요구를 절충해나갈 필요가 있다.

Soft Law가 효력이 있는 규범으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발언에서 강조한 것과 같이 정부의 노력도 필요하다. 입법부 및 행정부의 통제를 다소 벗어난 것이라 하여 Soft Law에 대해 효력을 부정하거나, 무리하여 개입하기 보다는 Soft Law의 존재 이유를 인정하고 Hard Law로 규제하기 어려운 영역에서 도입을 권장할 필요가 있다.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신기술들은 장차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예측하기 어렵다. 정부기관들이 Hard Law를 곧바로 제정하기 부담스러운 경우 민간기관과 협력을 통해 시험적으로 Soft Law를 제정하여 적용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Soft Law를 시행해 보면서 문제점과 발전 방향 등이 어느 정도 드러난 후에 Hard Law로 수용하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방향을 예측하기 어려워 어떤 규정도 만들지 못하고 기다리거나, 미성숙한 규제로 산업을 저해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1. 결론

4차 산업혁명의 기반이 되는 신기술들은 생소하고 어렵다. 신기술 하나도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이러한 기술들이 융합되었고 또 그 융합의 결과가 불러올 혁신도 예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신기술 사업자들은 힘들다. 소비자들에게는 자신의 신기술을 적용한 새 제품이, 새로운 서비스가 왜 좋은지를 어필해야 하고, 동시에 제품과 서비스를 출시하기도 전에 관할 감독청에게는 자신의 제품이 국가의 규제를 충족한다는 점을 설득해야만 한다. 그나마 관련규정이 있으면 따르면 되는데 그마저도 없으면 규제가 마련될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했던 경우도 많다. 신기술 사업자의 어려움은 곧 성장동력의 약화, 국가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최근 정부가 규제 샌드박스 도입을 포함하여 규제 완화를 하는 이유는 제조업 기반의 국가에서 4차 산업혁명에 기반을 둔 서비스업 등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발굴해내기 위함이다. 4차 산업혁명 기술과 산업의 육성을 위해서는 규제를 제정하고 준수여부를 심사하는 감독청 등 담당자는 과거 제조업 기반의 사고 방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기존에 해왔던 대로, 법규정을 제정하고 심사하면서 겉으로만 규제 샌드박스를 외치는 것은 효과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규제 샌드박스 등으로 규제를 완화하고 산업의 융합을 지원하려는 정부 부처의 노력도 의미가 크지만 규제 샌드박스로도 해결하기 어려운 신사업에 대해서는 유연한 규제가 가능한 Soft Law의 영역에 맡겨놓고 추이를 바라보아야 한다. 벼농사를 시작할 때 모판에 씨앗을 뿌려 어느 정도 크면 논에 모내기를 하는 것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4차 산업혁명 기술과 산업의 속성상 민간의 영역에서 Soft Law를 먼저 제정하여 성숙시키고 추후 정부기관 및 입법기관에서 Hard Law로 수용하는 것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적합한 법적 규제 태도일 수 있다.

법무법인(유한) 충정 양성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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